2026. 6. 8. 18:24ㆍ책속진주(교육,시대경영)
'사회성이 낮은 정서행동 문제 아동청소년의 개입'과 관련하여 심리학 쪽 분야의 전문가가 강의하는 것을 듣게 된 적이 있다. 이 책은 그 강의에서 추천해 준 도서인데 관심이 생겨 읽어보게 되었다. 약 7~800페이지 분량의 두꺼운 책에 100년도 채 안 되는 짧은 자폐의 역사에 대해 고스란히 적어놓은 책이다. 번역서이다 보니 다소 번역의 흐름이 어려운 부분이 있었지만, 자폐의 역사에 대해 통찰하기는 좋은 책이다.

1부. 최초의 자폐아(1930~1960년대)
1장. 도널드
실제로 도널드는 자기 세계의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특이한 점 중에서 부모는 이 부분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아빠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도 품에 뛰어드는 법이 없었다. 엄마를 간절히 찾는 일도 거의 없었다. 친척들 역시 아이와 사귀지 못했다. 언젠가 크리스마스에 혹시나 주의를 끌어볼까 해서 누군가 산타 복장을 하고 나타났을 때도 도널드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이렇듯 주변 사람의 존재를 아예 의식하지 않는 것 같다가도 자기가 하던 일에 방해를 받으면 즉시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29
극단적으로 동일함을 추구하는 성향 때문에 도널드는 일상생획 속에서 스스로 정해놓은 수많은 규칙을 하나라도 어기면 격렬하게 화를 냈다. 많은 규칙이 주문을 외듯 말로 하는 것이었다. 36 새로운 환경을 접할 때면 언제나 사람들을 무시 한 채 눈길을 사로잡는 물체에만 관심을 쏟았다. 38
2장. 사회악
1942년 7월, 미국정신의학협회 merican PsNchiaric Asociaion 공식 학 술지 <미국정신의학저널 americaun Joumal of psxchiaury )에 진지한 어조로 정신장애 어린이의 "안락사"를 옹호하는 논문이 실렸다. 55
3장. 첫 번째 환자
장난감 미끄럼틀을 주문하여 뒷 마당에 설치했지만, 미끄럼틀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이웃 아이들이 몰려들어 온통 미끄럼틀에 기어올라도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보다 못한 비먼이 안아서 미끄럼틀 위에 앉히려고 하자 미친 듯이 몸을 뒤틀며 저항했다. "미끄럼틀 위에 앉히자 공포에 질린 표정이었습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는 이야기가 달랐다. 다음날 아침 아이는 혼자 뒤뜰로 나가 계단을 오르고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왔다.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사용하는지 정확히 알았던 것이다. 비먼은 도널드가 미끄럼틀을 즐겨 사용했지만, 항상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였다고 적었다. 66
비먼이 느끼기에 아들은 장벽 뒤 자신만의 세계에 있을 때만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기쁨을 느끼지 못하거나 웃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 종일 행복해" 보이는 날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옆에서 아무리 재미있는 말이나 행동을 해도 곁에 다른 사람이 있는 한 전혀 즐거워하지 않았다. 오직 "혼자 즐겁게 노느라 바쁠 때"만 행복을 느꼈다. 66
4장. 야생 소년과 성스러운 바보들
자폐증 또는 자폐적이란 말 역시 카너가 만든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질병의 증상을 뜻하는 말에서 빌려온 것이었다. 바로 조현병이다. 이런 차용은 이후 자폐증을 논의할 때 두고두고 혼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지만, 카너 입장에서 보면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1943년 당시 조현병이란 병명은 환각, 사고장애. 현실과 비현실을 정확히 구별하지 못하는 잡다한 정신질환에 널리 사용되었다. 76
2부. 비난게임(1960~1980년대)
7장. 냉장고
엄마 숫자가 계속 늘어나는데도 자폐증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려는 노력은 지속되지 못했다. 너무 드물어 과학자들이 주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탓도 있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정신의학자들이 자폐증의 원인이 분명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최종 판결은 이랬다. "자폐증은 엄마가 자녀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병이다." 121
8장. 죄수 15209
죄수들이 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의 이름이나 특정한 날짜를 기억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행동은 자폐 어린이가 열차 시각표를 강박적으로 외우는 행동과 같은 것이었다. 삶이 산산조각 나기 전에 존재했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희망에 매달리는 것은 자폐 어린이가 언제나 동일함을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자폐를 직접 경험한 적이 없는 독자들은 유사점을 들어 자폐 행동을 설명하는 이론이 매우 흥미로웠을 것이다. 몇몇 사람만 아는 심오한 무언가를 비밀스럽게 전수받은 것 같은 만족감도 있었다 무엇보다 잔혹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진실을 깨달았다고 느꼈다. 자녀의 자폐중은 엄마의 잘못이다. 이것은 자폐와 강제수용소를 연결시키는 주장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그곳에서 성인들의 정신을 완전히 망가뜨린 것이 나치의 소행이라면, 자녀들의 정신을 망가뜨린 사람은 다름 아닌 엄마들이었다. 비유는 완벽했다. 엄마들은 강제수용소의 간수들이었다. 엄마들이 곧 나치였다. 139
9장. 카너의 잘못일까?
다음날 아침 미국 전역에서 자폐 어린이의 엄마들은 전날 밤 텔레비전을 본 사람들의 눈길이 전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의사, 특수교사, 심리학부 대학원생, 시부모, 이웃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말을 들었다. "아이에게 자폐가 있다면, 그것은 엄마가 자식이 죽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149
12장. 지각 변동
림랜드의 데이터베이스는 자폐란 현상이 인간이란 생물체 자체에서 기원했을지 모른다는 온갖 증거를 보여주었다. 엄마가 잘못 키웠기 때문이란 증거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심리에 주목하는 것은 핵심을 벗어난 것이며, 자폐증은 생물학적 현상이라고 확신했다.179
3부. 수용시설의 종말(1970~1990년대)
14장. 세상의 무관심이란 벽 뒤에서
예전에 자폐인들은 모두 어디에 있었을까? 20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시설에 수용되어 있었다. 소수는 쉬쉬한 채 감추어진 존재로 집에 머물렀다. 정신박약 꼬리표가 붙어 정신지체자를 위한 "훈련학교"에 보내지거나, 정신이상으로 진단된 사람들과 함께 입주형 정신병원 이란 범주의 시설에 보내진 경우도 많다. 19세기에 세워진 이런 시설 중 많은 수가 한때 "피난처 "라고 하여 희망을 약속하는 듯한 이름을 내세웠다. 자발적으로 피신하여 보호받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름이다. 하지만 수십 년간의 과밀수용과 예산부족, 치료하고 회복시키고 교육시킬 방법이 거의 없다는 절망이 점점 커지면서 굳건하고 너그러운 정신 또한 서서히 시들어갔다. 결국 시설들은 떠맡은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지 감시하고, 밥을 먹이는 일종의 구금기관으로 변질되었다. 반드시 제대로 된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의복조차 항상 제공되지는 않았다. 222
16장. 버스에 올라타기
아이가 심한 장애를 겪지 않아도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아이에게 심한 장애가 있다면, 그것이 조부모나 베이비 시터가 잠깐 한숨 돌리도록 도와줄 수도 없는 종류의 장애라면 언제까지고 끊임없는 압박을 이겨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수십 년 간 의사들이 수용시설을 권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장애 어 린이에게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해도, 부모가 겪는 수많은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부모의 문제 역시 너무나 생생하고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24시간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중증 자폐인 자녀를 돌보는 일은 종종 사랑만으로 해결할 수없다. 249
74세가 된 아치(그 전에는 주립병원 시스템 속에서 평생 살음)는 누나의 굳은 의지와 루스 설리번의 명성에 힘입어 웨스트 버지니아주 헌팅턴의 한 주택으로 옮겨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이제 그는 3.000명이 아니라 다섯 명과 함께 살았다. 1919년 이후 처음으로 자기 방이 생긴 것이다. 병원 장의 예상과 달리 죽지도 않았다. 다만 20세기 초에 잃어버린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70년 만에 그는 장난감을 갖게 되었다. 곰 인형이었다. 한시도 품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세발자전거 타는 법도 배웠다. 침대에서 어찌나 열심히 펄쩍펄쩍 뛰던지 직원들이 달려와 말려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뛰다가는 천장에 머리를 부딪혀 다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70대 노인 아닌가!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치는 공동체 속에서 끊임없이 성장했다. 노인이 되어서야 스스로 옷을 입고, 몸을 씻고, 방 정리하는 법을 배웠다. 스펜서를 떠날 때까지 결코 익히지 못했던 기술들이었다. 그림을 그렸고, 이내 색칠도 했다. 한 번은 친절한 목수가 나무판에 망치로 못 박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되었다. 1995년 그는 한집에 살던 모든 사람과 함께 노스캐롤라이나주 아우터 뱅크스로 거처를 옮겼다. 81세가 되어서야 처음 바다를 본 것이었다. 273
4부. 행동, 분석되다(1950~1990년대)
18장. 행동주의자
1960년대가 저물 무렵, 자폐증 치료 방법으로서 LSD에 관한 열광은 퇴조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이유는 LSD를 구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제조사 산도즈는 1965년에 생산을 중단했다. 쾌락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이 점점 늘자 1968년 미국 정부는 특별한 경우 외에 LSD 소지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연구 목적의 LSD는 미국립 정신보건원 National Institutes of Mental Healh에서 구할 수 있었지만 매우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게다가 1960년대 초반 연구들을 꼼꼼히 검토한 결과 LSD가 자폐 어린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는 주장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282
어린이들은 말을 한마디도 못했다. 자신의 몸에 행사하는 폭력이 바깥 세계에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을지 모른다. 286
19장. 소리지르고, 때리고, 사랑하기
수십 년간 수많은 실험실에서 이런 유형의 심리학을 연구한 사람들은 어떻게 생물의 거의 모든 행동이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되는지 밝히는 핵심적 원리를 발견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강화와 처벌 외에도 자극 stimulus, 반응 response, 행동형성 shaping, 조작적 조건형성 operant conditioning, 부정적 강화 negative reinforcement, 소거 extinction 등 이 분야의 어휘는 연구대상이 "보상"을 받거나. "처벌"을 피하기 위해 주어진 환경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 학습하는 과정을 기술한다. 한편 과학자들은 행동을 조절하기 위해 보상과 처벌 환경을 보다 완벽하게 통제하는 능력을 같고 닦는 데 힘썼다. 이것이 바로 행동주의라는 과학이다. 295
교실에서 학생들의 규율을 유지하고 학습 효과를 강화시키는 행동주의적 접근법이 개발되었다. 로바스가 자폐 어린이를 덜 '자폐적'으로 보이고 행동하도록 만들기 위해 사용한 것 또한 이런 행동주의적 방법이었다. 298
아이가 분노발작을 일으키는 동안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는 것은 행동을 더욱 강화하고, 심지어 더 자주 그런 행동을 유도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직원들은 분노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정성을 다해 디키를 달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엄마 역시 똑같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엄마의 본능이나 모성애라고 할 만 한 그런 충동이 행동분석가들의 눈에는 문제의 근원인 것 같았다. 엄마는 의도와 전혀 달리 보상을 통해 아이가 더 많은 분노발작을 일으키도록 유도한 셈이었다. 301
행동분석가들의 지시를 받은 병원 직원들과 부모는 이제 아이가 화를 내고 뒤집어져도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침착함을 유지하며, 아이의 행동에 조금도 주목하지 않았다. 무심한 태도로 즉시 아이의 손을 잡아끌며 타임아웃 장소로 정한 방으로 데려갈 뿐이었다. 소란을 피우지도, 안아주지도 않고, 한마디 말도 없이 문을 닫아 버렸다. 디키는 10분간 방안에 혼자 있어야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자 아이는 타임아웃을 거듭할수록 스스로 진정하는 법을 익혀나갔다. 몇 주가 지나자 점점 빨리 진정되었으며. 타임아웃 횟수가 점점 줄면서 분노발작의 강도 역시 점점 약해졌다. 두 달 반 후에는 분노발작을 일으킬 때도 더 이상 몸을 긁거나, 자기 뺨을 때리지 않았다. 결국 분노발작은 너무나 드물어져서 더 이상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 303
자폐증이란 "조현병의 특수한 형태"로서. "완전히 위축된 채 자신 속으로 파고든 어린이들은 모든 인간적인 접촉에 마음을 닫아버리고, 가정은 통제할 수 없는 광기에 의해 지옥으로 변한다." 자폐인과 함께 사는 것은 "악몽"이며 "끔찍한 광기의 전시장"이었다. . 그런 설명은 분명 로바스의 실험실에서 묘사된 비참한 광경보다도 훨씬 더 끔찍하게 들렸다. 305
20장. 혐오자극을 혐오하다
ABA는 심각할 정도로 이미지가 나빴다. 로바스가 처음 교육시킨 어린이들에게 사용한 핫-샷, 즉 소몰이용 작대기와 그것이 상징하는 모든 것들이 어우러진 이미지가 아직 대중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브루노 베텔하임조차 로바스의 실명을 거론하며 어린이들을 고분고분한 로봇.. 심지어 파블로프의 개 수준으로" 퇴행시킨다고 공격했을 정도였다. 1980년대 내내 소위 혐오 이슈는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해 기꺼이 처벌을 사용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며 ABA에 관한 가장 논쟁적인 주제가 되었다. 314
프로그램이 보급되는 데 또 한 가지 장애물은 비용이었다. 여덟 명의 대학생에게 계속 보수를 지급한다는 것은 일반 가정에서 감당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1980년대에 가정에서 정식으로 ABA 프로그램을 시행하려면 연간 5만 달러가 들었다. 당시 미국 주택 가격 중간값의 절반을 넘는 액수였다. 시간 부담도 엄청났다. 게다가 모든 시간과 노력과 비용에도 불구하고 로바스는 자폐증을 완치할 수 있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320
21장. 반 베텔하임파
쇼플러와 라이클러는 일정한 구조를 갖추고 정해진 시간 동안 정해진 순서로 어떤 활동을 해야 하는지 명백할 때 치료 반응이 가장 좋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332
쇼플러는 부모들을 단순 히값싸고 교육 가능한 보조인력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공동 치료사라고 불렀고, 부모들이 전문가에게 배우는 것만큼 전문가도 부모들에게 배울 점이 많다고 주장했다. 334
<자폐증과 어린이 조현병 저널 jur of Autism and Childhood schizoplreni> 창간호에 라이클러는 이렇게 섰다. "이제 자폐 어린이의 부모를 문제를 일으킨 사람으로 볼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로 보아야 한다." 자폐 부모 자신이 아니라 전문가가 선구적이며 공식적으로 부모 편에 섰다는 사실로 인해 쇼플러는 거의 "반베텔하임파"로 알려졌다. 334
어린이들은 교육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 반드시 부모가 참여해야 한다는 그의 확신은 자폐증 분야에서 전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식이 되었다. 341
24장. 법정에서 교실로
1990년에 통과된 장애인교육법은 이를 개정한 것으로 사상 최초로 자폐증을 장애의 한 범주로 명시했다. 근본적인 변화였다. 이제 모든 학교는 자폐 어린이의 필요에 따라 맞춤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다. 366
캐서린 모리스가 거의 혼자 힘으로 자폐 부모 사이에서 이바로 바스를 유명하게 만든 데 이어. 수많은 부모들의 "로바스 소송" 덕분에 ABA는 교육 및 보건정책을 집행하는 정부기구의 주목을 받게 된다. 애초에 정책 입안자들은 이 치료를 받아들이는 데 저항했지만 결국 태도를 급반전하기에 이른다. 1999년 뉴욕주 보건국은 최초로 조기개입에 대한 "임상진료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면서 ABA를 "아주 어린 자폐 어린이의 모든 중재 프로그램에서 중요한 요소"라며 지지 입장을 표명했다.
몇 달 뒤 사상 최로로 <미공중위생보건귀 정신보건보고서>가 발표되었다. 정신보건 분야를 총망라한 엄청난 규모의 이 보고서는 "30년 간의 연구 결과 응용행동분석의 유효성이 입증되었다"라고 선언했다. 심지어 로바스의 1987년 논문이 "잘 디자인된" 연구라고까지 했다. 이에 따라 21세기 들어 어느 때보다도 많은 학교에서 ABA를 제공하게 되었다. 381
이미 ABA는 수용성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로바스가 UCLA에서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자폐증의 본질에 관해서는 그다지 많은 것은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 질문을 다룰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며, 행동분석가들 역시 그런 질문과 치료 효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폐 어린이 문제에 모든 노력을 바친 과학자가 그들만은 아니었다. 대서양 건너편에서는 또 다른 연구자들이 전혀 다른 방향에서 자폐증이란 현상을 탐구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자폐증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384
5부. 런던에서 제기한 의문(1960~1990년대)
25장. 중요한 질문들
영국과 미국 연구자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했지만 우선순위가 크게 달랐다. 미국인들은 자폐증의 치료, 심지어 완치를 추구했다. 상황을 일종의 응급상태로 받아들이고, 되도록 빨리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다. 반면 호기심에 불타는 영국 연구자들은 치료보다 자폐증의 본질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자폐증의 모습을 보다 정확히 그려내고, 자폐인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려고 했다. 영국식 접근법은 50년간 특별한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벽에 부딪혔지만, 마침내 미국과 뚜렷이 다른 결과들을 내놓았다. 영국에서 훈련받은 소수의 실험심리학자와 학계에 몸담은 정신과 의사들이 내놓은 통찰들은 전 세계에서 자폐증이란 현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영원히 바꿔버렸다. 388 5년간 이런 식으로 꼼꼼하게 실험을 계속하여 세상에 관한 정보를 처리할 때 자폐 어린이가 나타내는 극히 작지만 정량화할 수 있는 차이를 꾸준히 밝혀냈다. 예를 들어 많은 자폐 어린이가 보고 듣는 것보다 촉감을 통해 더 많은 정보를 받아들였다. 전체적으로 그들은 다양한 데이터를 통해 자폐증에 신경학적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드디어 자폐증이 엄마의 사랑이 아니라 뇌와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가 나온 것이다. 397
26장. 누구를 셀 것인가
자폐증에는 생물학적 표지가 없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혈액검사로 뭔가를 측정하거나, 뺨 안쪽에서 면봉으로 검체를 채취하여 확인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오로지 어떤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방법으로만 진단할 수 있다. 결국 어느 정도 판단의 주관성을 피할 수 없다. 401
27장. 단어에 질서가 없다면
자폐 어린이가 비록 언어의 섬세한 구조와 그 안에 담긴 의미의 일부를 인지하지 못한다고 해도 비언어적 수단을 통해 제공된 정보에서 의미를 추론하는 능력은 뛰어나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런 결과는 다시 한번 자폐 어린이가 청각보다 시각을 통한 학습에 훨씬 적절히 반응한다는 사실을 시사했다. 410
29장. 경이로운 발견들
자페인은 패턴과 시스템을 인식하고 각 부분을 조작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보이지만 각 부분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어우러져 작동하는지 파악하는 능력은 떨어졌다. 다시 말해 큰 그림을 보는 데는 약하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대가가 될 수 있었다. 428
6부. 진단을 재정의하다(1970~1990년대)
30장. 자폐 스펙트럼
윙은 1984년 미국정신의학협회에서 발간한 <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편람 Diuemontcand satistical Manual of Menual Disorders.DSM ) 개정판의 편집자가 되었을 때 스펙트럼이란 개념을 도입했다. 440
윙이 생각하기에 레오 카너는 스펙트럼의 작은 한 조각을 본 데 불과했다. 물론 카너의 연구는 역사적이었다. 그의 연구로 인해 비로소 세계는 자폐증이라는 현상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그가 자폐증의 작은 일부만을 발견했을 뿐이며, 스펙트럼 속에는 그보다 월씬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그녀가 이 세계에 자폐 스팩트럼이란 개념을 소개한 것과 동시에 거의 아무도 들어본 적 없는 또 하나의 진단적 개념을 소개한 이유이기도 했다. 아스퍼거증후군이었다. 442
31장. 오스트리아 의사
비엔나 의료계의 문화 역시 나치 이념이 곳곳어 배어 있었다. 비엔나는 장애 어린이에게 특히 위험했다. 오스트리아가 제3제국에 합병되던 1939년 나치는 장애를 지닌 유아, 어린이 청소년을 죽여야 한다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장애" 속에는 신체질환은 물론 정신질환도 포함되었다. 캠페인은 '안락사 프로그램'이란 미명하에 이루어졌지만, 사실은 가장 약한 시민들을 제거하여 강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나치의 강박적 사고가 원동력이었다. 445
32장. 서명
채용되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아스퍼거가 히틀러 유겐트 비엔나 지부의 의학자문 자리에 지원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간단히 말해 크체히가 보기에 아스퍼거는 전쟁 중 내내 자신의 경력을 보호하고 "나치의 신뢰"를 더 많이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는 이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뭐든 마다하지 않았던 것 같다. 477
7부. 꿈과 한계(1980~1990년대)
33장. 언어라는 꿈
비클린은 미국 내 대부분의 공립학교에서 기정사실로 여겨졌던 장애인 분리 관행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그때까지 "특수교육"이란 분리된 교실에서 분리된 과목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했다. "통합교육", 즉 모든 학생이 동일한 공간과 동일한 교육서비스와 동일한 기회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비클런 의 좌우명이 되었다. 483
말을 할 수 없는 자폐 어린이를 정규학급에서 교육하는 데는 특별한 어려움이 따랐다. 학습의 향상이란 대화 능력, 교사나 다른 학생들과 필요한 반응을 주고받는 능력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783
말을 못 하는 자폐인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25년간의 실험이 이어졌지만, 1980년대 후반까지도 완벽하게 구현된 언어의 풍부하고 복잡한 경험에 조금이라도 근접한 방법은 개발되지 못했다. FC(촉진적 의사소통방법)가 나타난 것은 바로 이때였다. 490
34장. 내면에 갇힌 아이
1960년대 이후 부모들은 한때 유행하고 사라져 버린 숱한 치료들, 엄청난 홍분과 열광을 불러일으켰다가 실망으로 끝난 온갖 대체요법들을 시도해 왔다. 496
자폐증에 효과가 있다는 거의 모든 요법이 과학적 대조군 연구에서 효능을 입증하지 못했으며, 그때마다 수많은 부모들이 낙담했다. 그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니 많은 부모들이 기적의 최신 치료를 쫓아다니지 않는 것이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497
장애 어린이가 예기치 못한 행동을 시작하는 것은 학대의 결과일 수 있으며, 그런 가능성을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대처하는 것이 교사의 의무란 사실은 특수교육 종사자들 사이에서 하나의 상식이었다. 499
FC 가 널리 사용된 후 3년간 이렇게 꾸며낸 성적학대 시나리오는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505
2012년 말 그녀(보인턴)는 의사소통장애에 대한 임상적 및 교육적 해결책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했다. 제목은 "촉진적 의사소통의 잠재적 피해-전직 촉진자의 고백 Facilitated Communication What Harm It Can Do: Confessions of a Facilitator "이었다. FC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에 대한 일종의 공격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속아 넘어갔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한 후, 내면에 관한 아이에게 가 닿을 수 있다는 환상이 모든 이성을 마비시키는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라고 호소했다. 515
35장. 자폐증을 정의하라
정의 자체가 계속 변해왔으므로 사람들이 각자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자폐증을 정의하고, 그 때문에 때때로 엄청난 갈등을 겪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수십 년간 자폐증은 행동문제 또는 의학적 문제 또는 심인성 장애로 간주되었다. 엄마들에게 화살을 돌리기도 했고, 백신을 비난하기도 했다. 대처 방법 또한 "모성대체", 메가비타민 요법, 촉진적 의사소통, 뺨 때리기, 포옹요법, 일부 아프리카 국가의 퇴마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 글을 쓰는 현재 자폐증은 스펙트럼으로 발생한다고 간주된다. 포용성을 확장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자폐를 비극으로 여기는 사람들과 하늘이 내린 선물이자 하나의 정체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험악한 갈등을 초래한 개념이기도 하다. 517
1980년에 발간된 DSM-III까지도 자폐증은 진단명으로 등재되지 않았다. 521
36장. 과학을 지원하라
완치법을 찾아라! 어떤 치료가 가능한지 알아보았다. 신뢰할 만한 근거가 있어야 했지만, 본능적으로 도브에게는 점진적이며 노력이 많이 필요한 ТЕАССH 같은 프로그램보다 훨씬 빠른 방법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점진적인 방법이라면 "플로어타임 Floortime"이란 것도 있었다. 메릴랜드주의 심리학자 스탠리 그린스팬이 개발한 이 치료는 문자 그대로 부모와 어린이가 함께 바닥에 누워 어린이가 이끄는 대로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즐겁게 상호작용하는 것이었다. 530
자폐증의 근본 원인이 기질적, 즉 신체에 생긴 생물학적 문제라는 사실에는 대부분의 전문가가 동의했지만, 신체에 초점을 맞춰 치료를 제공하는 사람은 없었다. 의과대학에서도 그런 치료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런 치료가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531
37장. 마법사
각각의 자폐인은 매우 미묘하고 다양한 차이를 나타내기 때문에 최소한 수백 명의 DNA를 분석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의미 있는 유전정보를 얻으려면 형제들의 DNA까지 분석에 포함시켜야 했다. 550
과학계가 자폐증에 새롭게 관심을 갖도록 하고, 이를 위해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 젊은 연구자들이 자폐증을 경력의 중심에 두도록 유도하는 모든 일이 가능했던 것은 CAN과 NAAR의 창립자들 덕이다. 자폐증에 관해 확실히 알려진 것들과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들 사이의 경계는 항상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언제 까지나 존재하겠지만 그들은 힘겨운 노력을 통해 그것을 확장했다. 556
8부. 자폐증, 유명해지다(1980~1990년대)
38장. 자폐증, 수면 위로 떠오르다
이것이 20세기 영화에서 자폐증을 다룬 방식이다. 애초에 자폐증을 다룬 영화 자체가 워낙 드물었지만, 어쨌든 오직 사랑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문제로 그려낸 것이다. 566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극적인 내용이든, 부모들이 쓴 감동적인 이야기든, 잡지에 실린 암울한 기사든 자폐증에 관한 이야기 자체가 드물다는 사실은 일반 대중이 편리한 거리를 유지하는 데 충분한 구실을 제공했다. 사람들은 자폐증이 자기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든든함을 느꼈다. 자폐는 특이한 심리적 영역으로 치부되어, TV 채널을 돌리거나 책을 덮는 순간 마음에서 쉽게 몰아낼 수 있었다. 자폐증에 관해 제대로 만들어진 최초의 영화라 할 수 있는 <레인 맨>이 나온 것이 바로 이때였다. 569
<레인 맨>은 자폐증의 가장 초기부터 끈질기게 부모들을 괴롭혔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외부인에게 자폐증이 어떤 상태인지 설명하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것이다. 부모들은 오래도록 견딜 수 없을 만큼 외로웠지만 마침내 모든 사람이 적어도 대충은 자폐증이 어떤 상태인지 알게 된 것이다. 578
2001년 점심을 같이 하며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말을 꺼냈을 때 에밀리 거슨 제인스는 오래 설득할 필요가 없었다. 그랜딘은 자신의 삶을 그린 영화를 만든다는 생각을 매우 좋아했다. <나는 그리으로 생각한다>가 에밀리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말에도 매우 흡족해했다. 희망이야말로 두 사람이 더 멀리까지 퍼뜨리고 싶은 것이었다. 희망 말고도 퍼뜨리고 싶은 것이 또 있었다. 자폐인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더 많은 공감이었다. 이해와 공감이야말로 말 못 하는 소녀에 불과했던 그랜딘이 맨해튼에서 근사한 점심을 즐기며 영화 계약이란 사업 제의를 받는 존재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고, 그 징표로 악수를 나누었다. 이제 힘을 합쳐 자폐증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게 만들 영화, 하나의 실화로서 마음깊이 간직될 영화를 만들 참이었다. 583
한때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으며, 언론에서는 한낱 호기심거리로 다루었고 정치적 우선순위에서 늘 뒷전이었으며, 과학계에서는 경력에 찬물을 끼얹는 주제로 취급되었던 자폐증은 갑자기 시대의 가장 급박한 문제로 떠올랐다. 2010년에 이르면 자폐증은 언론의 강박관념이자, 뜨거운 정치적 쟁점이자, 엄청난 연구비가 걸린 과학적 주제가 된다. 583
39장. 사회적 비상사태
자폐증이 마침내 미국에서 진정 "유명해진" 것은 대중이 공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자폐증은 드물고도 매혹적인 현상에서 전국적으로 급속히 퍼지는 위협으로 돌변했다. 자녀를 키우는 사람은 물론 자녀를 가질 계획이 있는 사람조차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된 것이다. 자폐증이 사회적 비상사태 가되었다는 급작스러운 인식 변화는 상식적인 관찰에 근거했다. 자폐 어린이가 옛날보다 훨씬 늘어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585
부모들이 이토록 자폐증 진단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데는 강력한 동기가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친 로비 덕분에 각급 학교는 지적장애나 기타 다른 유형의 학습장애에 비해 자폐증 진단을 받은 어린이들의 필요에 휠씬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이다. 부모들의 활발한 활동에 힘입어 자폐증이란 진단명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상당히 줄기도 했다. 진단을 내릴 권한이 있는 소아과 의사나 전문가들이 자기 '환자'가 더 좋은 프로그램과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평가기준을 덜 엄격하게 적용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596
9부. 유행병(1990~2010년대)
40장. 백신공포
문제는 주류 의학계에서 신뢰할 만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확실성은 데이터를 필요로 하며, 데이터를 모으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때까지 웨이크필드 말고는 자폐증과 MMR이 관련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들여다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안전성에 관해 전문가들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증거는 안전하지 않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부모들이 진정으로 묻고 싶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부모들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MMR이 위험하지 않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623
"2007년까지 3~5세 어린이 중 자폐증 진단이 감소하지 않는다면 자폐증-티메로살 가설에 치명타가 되겠지요."
마침내 마감 시점인 2007년이 되었지만 캘리포니아주의 자폐증 유병률은 떨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올라갔다. 다시 일 년이 지나자 유병률은 더욱 높아졌다. 671
41장. 거대한 사기
"지난 20년간 어린이 예방접종과 자폐증 사이의 관련성에 관해 광범위한 연구가 수행됐다. 결과는 명백하다. 백신은 자폐증음 일으키지 않는다. 685
10부. 현재
44장. 당사자의 목소리
자기를 아스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점점 발전시켜 인류의 지식과 문화에 큰 공헌을 한 인물 중 자폐인이었으리라 짐작되는 사람의 이름을 대는 일종의 게임을 만들기도 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아이작 뉴턴, 에밀리 디킨슨, 에이브러햄 링컨. 미켈란젤로, 모차르트, 반 고흐 등이 흔히 언급되었다. 705
1960년대부터 전문가들은 대부분의 자폐인이 지적으로도 장애 상태라는 데 확고한 의견일치를 보았다. 몇몇 연구 데이터를 근거로 한 결론이었다. 자폐인 중 70~80퍼센트가 "평균미만" 수준의 지능을 나타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폐스펙트럼이란 개념이 생기기 전, 정의 자체가 달랐던 시대의 연구들이었다. 2010년, 진실의 추는 반대 방향으로, 그것도 급격히 기울었다. 그해에 CDC는 자폐증으로 진단받은 사람의 거의 절반이 높은 수준의 지능을 나타낸다고 보고했다. 자폐 스펙트럼에 훨씬 많은 사람을 포함시킴으로써 나타난 "인구학적 변동"으로 인해 유병률이 상승한 동시에 사회적으로 깊은 수준의 변화들이 뒤따랐다. 712
45장. 신경다양성
1993년 7월 짐 싱클레어라는 서른한 살 된 남성이 토론토에서 열린 자폐증학회에서 대부분 부모인 청중 앞에 서서 자신을 자폐인이라고 소개한 순간을 신경다양성 운동의 시작으로 잡는다. 714
중증 자폐어린이가 어떤 면에서는 병자가 아니라는 신경다양성 운동의 주장은 2007년 당시 훨씬 급진적인 사고방식이었고, 귀 기울이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725
신경다양성 운동은 20세기 후반 아스퍼거 증후군을 인식한 데서 생겼다. 734
왜 자폐증이라는 이야기는 무려 80년간 서로 분열되고 격렬한 논쟁을 겪어 왔는지에 대한 설명은 많은 부분 이런 불확실성 속에 놓여 있다. 자폐증이란 개념은 애초에 규정하기 힘들고, 설명하기도 애매하며, 거의 무한대에 가까울 정도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자폐증에 관해서는 누구든, 어떤 말이라도 할 수 있었으며 앞으로 도 그럴 것이다. 이런 현상은 과학과 사회에서 법과 심지어 종교 영역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론, 치료, 주장, 해석, 논란들이 "자폐증"이란 단어와 결합할 때마다 되풀이되었다. 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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