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고 말하기 | 김정운 | 21세기북스(2026)

2026. 9. 1. 06:41영혼,마음경영

밀리의 서재에서 우연히 제목에 이끌려 읽게 되었다. 분명 잘 아는 분야 같은데 읽을수록 어려운 책이었다. 
인간은 말보다 말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말이 더욱 많다. 표정이나 제스츄어, 심지어 감정선까지 우리의 모든 의사소통 도구가 된다. 
이 책을 통해 조금 더 의사소통을 잘 하는 법에 대해 배운다. 

1. 터치

 
인간의 감정은 지극히 상호적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남의 정서를 공유하도록 프로그램이 짜여 있습니다.* 그래서 정서를 공유하지 못할 때, 외로워집니다. 외로움의 본질은 내 감정을 남과 공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19
 
이미 오래전 연구에서 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더 자주 터치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28
 
대통령에 선출된 후, 오바마는 주먹 인사를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만들었습니다. 백악관의 청소부, 바비큐 레스토랑의 직원, 혹은 길거리의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나누는 오바마의 주먹 인사에 지지자들은 열광했습니다. 아주 친근하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 행동은 그의 피부색에 대한 미국 사회의 오래된 편견을 상쇄하고도 남았습니다. 23
 
『털 없는 원숭이』라는 책으로 유명해진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Desmond Morris는 『인간의 친밀 행동』에서 ‘어깨 두드리기’와 ‘박수’ 같은 친밀 행동은 유아기 엄마의 포옹에서 기원한다는 주장을 합니다. 25
 
어린 연주자나 아마추어 연주자와 달리 연주 경험이 많은 노련한 연주자는 관객의 박수를 받을 때, 두 팔을 벌려 한참 동안 관객을 바라봅니다. 박수 소리는 더 커집니다. 연주에 쏟은 수고에 합당한 보상(박수)을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연주자는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합니다. 아주 천천히. 이때 팔을 벌리는 연주자의 행동은 엄마가 안아주기를 기다리는 아기의 행동과 발생학적으로 동일합니다. 27
 
신경에는 촉각과 압각을 전달하는 ‘두꺼운 섬유(A-beta 섬유)’와 통증을 전달하는 ‘세밀한 섬유(A-delta 섬유와 C 섬유)’가 있는데, 이들이 전달하는 신호의 상대적인 강도에 따라 통증이 달리 느껴집니다. 이때 촉각이나 압각을 전달하는 A-beta 섬유는 통증을 전달하는 A-delta 섬유나 C 섬유보다 빨리 전달됩니다. 다시 말해, 촉각이나 압각이 먼저 뇌에 전달되어 통증을 전달하는 게이트를 닫아버린다는 겁니다. 그 결과 아픈 부위를 문지르거나 누르면 덜 아프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엄마 손은 약손’이 맞습니다. 28
 
해리 할로는 원숭이 실험을 통해 '접촉 위안'과 '안전기지'라는 개념을 이끌어냅니다. 그 당시 애착관계는 '음식제공'등과 같은 외적 보상으로 형성된다는 '행동주의. 심리학'이 유행할 때입니다. 그러나 외적 보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촉각적 위로와 따뜻함이라고 할로는 반박했습니다. 할로의 실험과 주장은 같은 해 발포된 존 볼비의 애착이론과 더불어 현대 발달심리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35
 
‘감각 및 운동 호문쿨루스’. 뇌의 활동과 관련된 신체 크기를 표현한 것이다. 뇌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의 크기는 손, 입술, 혀 등의 순서다. 36
 

2. 눈맞춤

 
스위스의 심리학자 피아제는 아동의 인지 발달 단계를 크게 4단계로 나누었습니다. 감각운동기 Sensomotorische Phase, 0~2세/ 전조작기 Präoperationale Phase, 2~7세/ 구체적 조작기 Konkret-operationale Phase, 7~11세/ 형식적 조작기 Formal-operationale Phase, 12세 이상. 이렇게 4단계를 거쳐 아동의 인식능력 최종적으로 추상적 사고가 가능한 형태로 발달합니다. 여기에는 물론 자아 인식능력도 포함되지요. 43
 
반드시 문화적 맥락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상호작용이 내면화된 결과인 자아는 문화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비고츠키의 주장은 문화역사적 맥락과는 상관없는 인지능력에 대한 피아제류의 심리학 이론을 기초부터 뒤흔들었습니다. 문화심리학cultural psychology이라는 새로운 영역은 바로 이 같은 비고츠키의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43
 
눈의 흰자’ 때문에 인간은 지구를 정복했습니다 일부 동물들도 눈맞춤을 하지만, 인간의 눈 맞춤은 질적으로 다른 차원입니다. 눈의 흰자위, 즉 ‘공막鞏膜, sclera’ 때문입니다. 유난히 크고 흰 공막 white sclera은 인간의 눈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부위입니다. 대부분의 동물은 공막을 숨기기 때문에 눈동자와 구별이 어렵습니다. 시선의 방향을 다른 동물들이 예측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흰 공막으로 시선의 방향을 분명하게 노출합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치명적인 약점이 되지만, 인간에게는 복잡한 사회적 소통을 발달시키고 지구의 정복자가 되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습니다. 50
 
엘리아스는 인간 문명을 ‘감정의 온순화emotional pacification’로 설명합니다. 더 자세히는 ‘감정 통제 Affektkontrolle’ 혹은 ‘감정 억제 Affektbeherrschung’로 인간 문명을 해석합니다. 인간 사회가 점진적으로 폭력과 원초적 감정 표현을 억제하고, 자기 통제를 내면화하여 오늘날의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57
 
한국 사내들에게 군대가 힘든 것은 단지 육체적 훈련이 힘들어서가 아닙니다. 부끄러움과 수치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개인 공간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2~4명이 한 공간을 사용하도록 단계적으로 전환하고 있다지만, 예전의 군대는 수십 명이 좁은 공간에서 함께 지내야 했습니다. 모든 개인행동이 공개된 장소에서 온갖 종류의 수치와 부끄러움에 고스란히 노출된 채 생활했습니다. 저녁 점호시간에는 팬티까지 벗어 ‘특수 부위’의 위생 상태를 확인받았습니다. 군인은 ‘개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장교의 품위는 장교의 공간이 따로 주어지기 때문에 유지됩니다. 62
 
사이버스페이스의 본질은 공간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호작용에 있습니다. 이런 상호작용은 인류가 지금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영역입니다. 전통적 ‘공간’ 개념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비물질성, 비선형성의 연결망입니다.41
 
공간이 아닌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새로운 세계에서 지금까지 우리의 행동을 지배했던 원칙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립니다. 66
 

3. 정서조율

 
얼굴 인식과 관련한 문화적 차이는 상호작용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눈과 입 주변에 시선이 고정되는 서양인들은 표정 변화에 예민합니다. 그래서 밝은 표정을 지으려 애쓰는 겁니다. 반면 동양인들은 표정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동양인들은 대부분 무표정입니다. 75
 
심리학자 폴 에크먼Paul Ekman은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보편적 감정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기쁨/행복 enjoyment/happiness, 슬픔 sadness, 분노 anger, 두려움 fear, 놀람 surprise, 혐오 disgust라는 6가지 ‘기본 감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감정들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어 있기에 문화, 인종, 언어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똑같이 표현하고 경험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기본 감정을 표현하는 얼굴 표정은 보편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76
 
높은 음조pitch, 과장된 억양 intonation, 느린 속도 slow tempo, 반복적이고 단순한 문장 구조를 갖는 베이비 토크는 전 세계 엄마가 사용하는 말투로 영유아기의 애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베이비 토크가 성인들 사이사이에서 쓰일 경우에는 사뭇 그 사회적 의미가 달라집니다. 주로 비대칭적 권력관계나 관리, 통제의 상황에서 사용됩니다. 친절하고 부드러운 듯하지만, 실제로는 규율을 강조하고, 지시에 따르도록 하는 전략이지요. 장기 요양 환자들을 보살피는 간호사, 간병인에게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말투입니다. 이를 ‘2차 베이비 토크 secondary baby talk’라고 합니다. 83
 
사람들은 타인과 감정 표현을 통한 정서 공유를 부담스러워합니다. 특히 스마트폰을 통한 SNS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음성 통화로 인한 정서적 부담을 피하려고 합니다. 전화 통화의 경우, 상대방에 따라 감정노동 수준의 ‘실시간 감정 연기’를 해야 하니까요. 이를 혹실드는 ‘감정의 외화display of emotion’라고 정의합니다. 조직이나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표정, 몸짓, 목소리 톤을 ‘연기’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감정을 아주 쉽고 편하게 표현할 수 있는 이모티콘이나 문자를 사용합니다. 87
 
인간의 부정적 감정(분노, 슬픔, 공포)은 긍정적 감정보다 더 강한 반응을 유발하고, 더 오래 지속됩니다. 부정적 감정 어휘가 긍정적 감정 어휘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정교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인은 ‘화가 난다’라는 감정을 ‘짜증나다’, ‘성질나다’, ‘열받다’, ‘울화통 터지다’ 등등 강도, 지속 여부, 원인에 따라 셀 수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긍정적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는 ‘좋다’, ‘기쁘다’, ‘즐겁다’ 등으로 그리 많지 않습니다. 기억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정적 기억이 훨씬 더 오래갑니다. 이를 ‘뜨거운 난로 효과 hot stove effect’라고도 합니다. 난로 뚜껑에 손 한번 데인 것만으로도 평생 난로 근처를 멀리합니다. 반면 긍정적 경험은 여러 번 반복되어야만 비슷한 효과가 나타납니다.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부정적 인상이 생기면 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수십 번은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만 비로소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89
 
온라인 뉴스 헤드라인에 부정적 단어(위기, 논란, 실패 등)가 포함되면 클릭률이 상승하고, 긍정적 단어는 오히려 클릭률이 감소합니다. 89
 
모리스에 따르면, 얼굴에서 털이 사라지면서 인간은 얼굴의 미세한 근육 변화로 야기되는 감정 표현을 정서적 신호로 발전시켰습니다. 공포, 분노, 기쁨과 같은 복잡한 감정을 표정이라는 비언어적 채널을 통해 타인과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정서 교환을 통한 소통이 더욱 정교화되면서 마침내 인간은 언어라는 가장 강력한 수단을 갖게 되었습니다. 91
 
털 없는 원숭이’가 된 인간의 가장 큰 변화는 섹슈얼리티에 있다는 것을 모리스는 아주 다양한 예를 들어 설명한다. 섹스가 종족 번식의 수단이 아닌 즐거운 놀이가 된 것은 ‘털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91
 
영국 왕실의 해리 왕자Henry Charles Albert David는 한 인터뷰에서 ‘수염이 나의 불안에 대한 방패 a shield to my anxiety’라고 언급합니다. 수염이 없을 때, 더 불안하고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더 의식하게 된다고 합니다. 91
 
의사소통에서 ‘말의 내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7%에 불과합니다. 목소리의 톤이나 억양 같은 청각적 요소의 비중은 38%, 표정과 몸짓 같은 시각적 요소의 비중은 55%를 차지합니다. 이를 ‘7-38-55 법칙’, 혹은 이 연구를 발표한 알버트 메라비언 Albert Mehrabian 교수의 이름을 따서 ‘메라비언의 법칙 Mehrabian’s rule’이라고 합니다. 95
 
사고의 본질이 곧 표상이라는 관점은 훗날 스위스의 발달심리학자 장 피아제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립되었습니다. 피아제는 머릿속에 무엇인가를 떠올리는 능력의 기원을 ‘지연 모방deferred imitation’에서 찾았습니다. 지연 모방이란 아이가 어떤 행동이나 대상을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모방하는 것을 뜻합니다. 지연 모방이 가능하려면 그 모방의 대상을 아이의 마음속에 ‘모사 abbilden’하고 그 이미지를 ‘저장 speichern’해야만 합니다. 48
 
지연 모방은 수동적 흉내 내기가 아니라, 외부 대상을 자기 내부의 표상체계로 재구성하여 자율적으로 재현하는 능력입니다. 105
 
지연 모방을 통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상황을 재구 재구성하게 된 아이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세계를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막대기를 총처럼 들고 뛰어다니거나, 인형에게 밥을 먹입니다.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기도 합니다. 이런 행동은 단순한 모방이 아닙니다. 대상의 내적 표상을 변형 또는 편집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매우 창조적인 행위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기초이고,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고유한 상징적 미메시스입니다. 언어의 출현과 문화 형성은 이 같은 미메시스의 결과입니다. 106
 
우리는 멍하니 있을 때, 가장 창조적입니다. 생각이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문화심리학적 관점에서 창조적 사고의 가장 큰 특징은 ‘의식의 흐름 stream of consciousness’입니다. 생각이 자유롭게 날아간다는 의미입니다. 한계를 뛰어넘는 창조적 생각은 바로 이때 일어납니다. 120
 
대니얼 스턴은 엄마와 아기의 상호작용에서 구성되는 역동적 정서를 ‘감각 정서’라고 명명하고 그 특징을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음악적 개념으로 정리합니다.
1. 시간성 temporal contour/temporal shape, 2. 강도 intensity, 3. 형태/윤곽 contour/shape, 4. 리듬 rhythm, 5. 운동성/움직임의 질 movement quality. 135
 
AI는 절대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상호작용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가끔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것 같지만 이는 ‘프로그래밍된 이벤트 트리거 event trigger’ 일뿐입니다. 즉, 사전에 정해진 조건·규칙에 따라 자동으로 실행되는 현상입니다. 139
 
AI에게 가장 치명적인 점은 ‘리듬’이 없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자신만의 리듬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리듬의 공유가 소통의 출발입니다. 139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서 공유가 안 되는 조직은 망합니다. 흔히 말하는 ‘조직 문화’를 심리학적으로 번역하자면 ‘정서 공유의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7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회의 시간이 늘어난 가장 큰 이유는 ‘리더의 불안 insecurity’입니다. 조직의 다변화에 따라 리더가 갖게 되는 통제력 저하에 대한 두려움이 회의 시간을 갈수록 늘린다는 이야기입니다. 157
 
불안할수록, 조직의 정서 공유 시스템을 점검해야 합니다. 기업의 지식경영 knowledge management을 주장한 일본의 경영학자 노나카 이쿠지野中 郁次郎는 지식을 ‘명시적 지식 explicit knowledge’과 ‘암묵적 지식 tacit knowledge’으로 구분합니다. 명시적 지식은 문서, 매뉴얼, 데이터베이스처럼 언어로 쉽게 표현되고 전달, 공유가 가능한 지식입니다. 반면 암묵적 지식은 개인의 경험, 직관, 노하우처럼 언어나 문서로 쉽게 표현하기 어려운 지식을 의미합니다. 조직 내에서 두 지식은 서로 영향을 미치며 새로운 지식을 창출합니다. 158
 
‘회의가 길어지는 회사’는 암묵적 지식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암묵적 지식은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경험과 감각 속에서만 살아 움직입니다. 바로 이때 정서 조율이 핵심 통로가 됩니다. 정서 조율을 통해 구성원들은 서로의 감정 리듬과 뉘앙스를 맞추며, 문서로 설명할 수 없는 노하우와 통찰을 공유합니다. 즉, 암묵적 지식은 정서적 공명을 매개로 조직 안에서 전해지고, 그 과정이 건강하게 작동할 때 회의는 길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즐거운 조직만이 살아남는다는 이야기입니다. 158
 

4. 순서 바꾸기

 
지휘자는 이 침묵을 통해 ‘청중의 호흡’을 음악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청중들의 호흡과 감정이 침묵하고 있는 연주의 빈 공간을 채웁니다. 청중의 정서적 반응이 연주되는 순간입니다. 그 정적을 통해 음악은 연주자만의 몫이 아니라 같은 공간에 있는 모든 이들이 공유하는 것이 됩니다. 162

대화의 미세한 억양과 멈춤과 시작을 알리는 ‘음’, ‘어’, ‘하하’와 같은 발화 단위를 분석한 결과, 이런 소리는 단순한 잡음이 아니라 순서 바꾸기를 알리는 신호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166
 
언어란 한 개인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의 행동에 반응하며 순서와 리듬을 조율해 가는 상호작용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즉, 언어의 본질은 ‘문장’이 아니라 ‘문장과 문장 사이의 리듬과 순서’에 있다는 통찰입니다. 167
 
언어 습득 이전의 엄마-아기의 상호작용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감정을 교차편집하며 소통의 기본 문법을 세워나가는 창조적 실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170
 
피아제가 말한 까꿍놀이의 대상 연속성이 ‘세상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존재의 법칙을 배우는 과정이라면, 브루너가 본 까꿍 놀이는 ‘모든 관계에는 순서가 있다’는 사회적 법칙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아기는 엄마의 얼굴이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것에서, ‘이제 내 차례야’라는 감각을 익힙니다. 아울러 내 차례가 되면 무조건 반응해야 한다는 책임도 익힙니다. 브루너는 이 단순한 놀이 속에서 언어의 원형, 즉 ‘대화의 차례 turn’를 읽었습니다. 173
 
대화란 단순히 말을 주고받는 행위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이 동시에 조율되는 과정입니다. 상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사람의 의도를 예측하고, 그에 맞는 감정과 생각을 준비합니다. 순서 바꾸기는 단순히 물리적인 차례의 교환이 아니라 ‘공동 사고 co-thinking’와 ‘공동 감정 co-feeling’을 전제로 한 상호 조율의 과정입니다. 이렇게 예측과 공감이 맞물리며 작동할 때, 대화는 진정한 의미의 상호주관적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순서 바꾸기야말로 사회적 지능의 바탕이며, 관계를 유지시키는 가장 미묘한 형태의 기술입니다. 180
 
오버랩을 장려하는 문화도 있습니다. 이탈리아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오버랩은 상대방의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흥미롭게 대화에 참여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로 여기기도 합니다.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하는 것을 열정적이고 유능한 대화 참여자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186
 

5. 함께 보기

 
상호주관적 세계의 출발은 시선입니다. 대상을 향한 시선은 사람의 생각과 의도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197 연구 결과, 여성은 ‘웃긴 남자’를, 남성은 ‘잘 웃는 여자’를 선호한다. 여성은 남성의 유머를 지능과 창의성의 신호로 해석한다. 반면 남성은 여성의 반응을 ‘관심의 표현’으로 받아들여 더 큰 호감을 느낀다. 198
 
남녀가 이성에게 보내는 시선을 연구한 ‘시선추적 eye-tracking’ 관련 문헌을 살펴보면, 무척 흥미롭습니다. 남녀 시선의 본능적 차원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남자나 여자 모두 상대방의 얼굴을 제일 먼저 봅니다. 그러나 남자의 시선은 바로 여자의 가슴과 허리 라인으로 이동합니다. 여자의 시선은 남자의 얼굴 부위에 훨씬 오래 머뭅니다. 남자의 시선은 ‘부분 집중형’입니다. 성적 매력이 드러나는 특정 부위, 특히 가슴에 시선이 꽂힙니다. 여자는 남자의 눈을 더 오래 바라봅니다. 상대방의 진실성을 파악하려는 본능입니다. 그다음 남자의 어깨와 키에 시선이 갑니다. 신체적 강인함을 확인하려는 것이지요. 남자와 달리 여자는 상대방의 특정 부위에 시선이 집중되지 않습니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는 것이지요. 198
 
인간의 이타적 행동은 생후 14~18개월 무렵이면 폭발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시기는 ‘남을 도와야 착한 어린이’라는 부모의 본격적인 훈련을 받기 전입니다. 돕는다는 행동을 가르치지 않아도 타인의 목표를 이해하고 자발적으로 도와준다는 주장입니다. 205
 
사회적 참조는 우리가 ‘모르는 상황’에 처했을 때만 작동하는 생존 본능입니다. 아울러 아기는 모르는 상황에서 아무나 쳐다보지 않습니다. 이는 아기가 수동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타인의 정서를 이용하는, 주체적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사회적 참조는 사회적 신뢰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하면 옆 사람을 둘러봅니다. 함께 볼 사람이 없으면 외롭고 우울한 겁니다. 210
 
소통의 절반이 언어가 아닌 공간과 몸짓으로 완성된다면, 반대로 소통을 파괴하는 길 또한 명확해집니다. 상대가 필사적으로 허공에 그리는 생각의 지도를 싹 무시해 버리면 됩니다. 상대방의 눈도 보지 않고, 손의 움직임도 보지 않는 겁니다. 상대방의 소통 시도를 무시하듯 정면을 응시하거나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 앞에서는 말하는 이가 열심히 만들어내는 소통의 공간이 아주 간단히 무너져 내립니다. 215
 
신석기시대 부족 마을의 평균 인구는 150명 정도였습니다. 로마 시대 군대의 기본 단위인 켄투리아centuria*는 60~80명이지만, 실제 전장에서의 전술 단위는 두 개의 켄투리아를 합친 150명 내외의 ‘마니풀루스manipulus’였습니다. 놀랍게도 오늘날 보병사단의 중대 크기도 대부분 150명 내외입니다. 로마 시대 이후로 그리 큰 변화가 없습니다. 서로를 동료로 인식하며 믿고 싸울 수 있는 숫자는 150명이 한계라는 것이지요. 던바는 자신의 ‘150명 한계론’을 뒷받침하는 가장 완벽한 사례로 종교 공동체인 ‘후터 파 Hutterites’를 꼽습니다. 220 밀그램의 실험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집단’은 다섯 명에서 시작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1~2명일 때는 그저 ‘개인적인 자극’ 일뿐이지만 5명의 시선이 한 곳을 향할 때는 ‘객관적 상황’이 됩니다. ‘저기에 분명 무엇인가가 있다’라는 무언의 합의가 형성되고, 새롭게 형성된 상황을 확인하려 합니다. 밀그램은 집단의 행동을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정보 획득의 과정으로 해석했습니다. 5명이나 올려다본다면 나에게 매우 중요한 정보(예를 들면, 화재나 물건의 낙하)가 있을 확률이 높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따라서 집단의 시선에 맞추는 것은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얻으려는 효율적인 전략입니다. 224
 
가상의 현실을 혼자만 믿으면 ‘미친놈(!)’입니다. 그러나 함께 믿으면 ‘놀이’가 되고, ‘문화’가 됩니다. 우리의 상상은 죄다 ‘함께 믿는 것들이 내면화된 결과’라는 것이 비고츠키의 주장입니다. 228
 
망각은 신이 내린 저주가 아니라 우리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생존의 에너지입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섹스가 재미있어서 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의 그 강렬했던 쾌락이 너무나 쉽게 잊히기 때문에, 그 느낌을 다시 확인하고 싶어서입니다. 231
 
슬픔과 고통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그 괴로움의 경험을 분명하게 기억해야만, 미래에 닥쳐올 고통(위험)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부정성 편향’이라고 합니다. 같은 강도의 긍정적 자극과 부정적 자극이 있을 때, 인간은 부정적인 것에 더 강하게, 더 오래 반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232
 
부부 관계 전문가인 존 고트만은 원만한 부부 관계를 유지하려면 ‘1:5의 법칙’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배우자에 대한 ‘1번의 비난’을 만회하려면 ‘5번의 칭찬’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른바, ‘고트만의 비율 Gottman Ratio’입니다. 233
 
슬픔과 괴로움은 기록되고, 행복과 재미는 쉽게 잊힙니다. 수십만 년 인류 진화가 가능했던 비밀입니다. 234
 
유튜브에서 ‘좋아요’ 클릭은 ‘관심’의 단위로 기록된다. 자본주의는 넘쳐나는 정보와 제한된 인간의 관심을 팔고 사는 ‘관심경제’를 구축했다. 239
 
누군가와 함께 바라보고, 공감하는 소통의 시선이 이제 상품이 되었습니다. 기업과 미디어는 우리의 ‘함께 보기’ 본능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킹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길어야 수십 초짜리 ‘쇼츠’는 그 해킹 방식의 정점입니다. 한번 클릭하면 한두 시간은 그냥 붙잡혀 있습니다. 함께 보기의 본질은 시선의 ‘공유’에 있지만, 관심경제에서는 시선을 ‘독점’합니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시선의 일방적인 ‘채굴’입니다. SNS는 우리의 시선이 타인과 공유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자극적인 썸네일과 혐오 표현으로 우리의 시선을 강탈하여 그 좁은 스마트폰 화면에 묶어둡니다. 240
 

6. 관점 바꾸기

 
디지털 사회의 깃털처럼 가벼운 관계와 불투명한 타자를 견디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입니다. 244
 
MBTI의 느닷없는 열풍은 이 같은 집단적 불안의 결과물입니다. ‘MBTI로 규정되는 나’는 ‘관계로 규정되던 나’의 응급 대체물입니다. 248
 
한국식 자기 입증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타인과의 비교, 객관적 지표로 증명, 외부 승인. 21세기에 들어 한국이 스마트폰 강국이 되면서, 이러한 자기 입증 방식은 아주 구체적으로 생활화됩니다. 팔로워 수, 좋아요, 구독자 수, 조회 수는 ‘비교와 증명을 위한 객관적 지표’가 됩니다. 아울러 실시간 반응, 댓글, 공유 등은 ‘외부 승인의 증거’가 되는 것이지요. 자율적 주체를 지향하는 서구의 개인주의는 타인으로부터의 독립이 궁극적 목표입니다. 그러나 한국식 개인주의는 끊임없는 노출을 매개로 타인의 시선으로 평가받고, 증명하고, 인정받고자 하는 ‘타자 의존적 존재’입니다. 257
 
낯선 문화 경험이나 여행이 ‘관점 바꾸기’ 능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장소의 이동은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정신적 시선 돌리기’의 생리학적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행을 통해 물리적으로 낯선 좌표에 자신을 자꾸 던져 넣는 행위는 뇌의 TPJ 회로를 반복적으로 자극하는 훈련처럼 작용합니다. 공간적 낯섦을 해결하기 위해 동원되는 주의 전환이 타인의 감정과 맥락을 수용하는 심리적 유연성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타인을 향한 공감의 본질은 이처럼 나 중심의 세계를 잠시 비우고 타자가 서 있는 공간의 좌표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272
 
피아제의 세 산 실험으로 확인된 ‘관점 바꾸기’ 능력의 진화는 아동이 자기중심적인 1인칭 시점을 벗어나 공간 전체를 객관화하고 통제할 수 있는 ‘전지적 시점’을 갖게 됨을 뜻합니다. 바로 이 능력이 인간 문명을 가능케 한 것입니다. ‘메타인지 metacognition’의 탄생입니다. 277
 
학습 성과가 높은 학생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했습니다. 반대로 학습 성과가 낮은 학생들은 실제로는 이해하지 못했는데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학습 결과의 차이는 단순한 지식의 양이 아니라 자기 이해 상태를 얼마나 정확하게 점검할 수 있는지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280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습니다. ‘자기중심적 언어’와 관련된 피아제와 비고츠키의 논쟁에서 언급했듯, 혼잣말은 내 안의 ‘또 다른 나’가 말을 걸어오는 것입니다. 바로 메타인지입니다. 283
 
휴식’과 ‘놀이’를 구분해야 합니다. 휴식은 자극의 강도를 낮추는 일이고, 놀이는 자극의 강도를 높이는 일입니다. 이 차이를 ‘적정 각성 수준 optimal level of arousal’이라는 심리학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 자극이 너무 낮아 지루하면, 인간은 자극의 강도를 높여 ‘최적의 각성 상태’로 나아가려 합니다. 이것이 바로 ‘놀이’의 심리학적 기능입니다. 반대로 자극이 너무 과도하여 불안하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면 자극을 낮추어 다시 최적의 상대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 자극 낮추기가 바로 ‘휴식’입니다. 286
 
한국 사람들의 결정적 약점은 ‘놀이’와 ‘휴식’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쉬라고 하면 놉니다. 이미 현실의 자극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데, 더 높입니다. 그러니 항상 극도의 각성 상태입니다. ‘건들기만 해 봐라’ 하며, 분노와 적개심을 드러낼 기회만 노리고 사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287
 
한국의 문제는 리더들이 너무 바쁩니다. 그리고 그 바쁨을 ‘성공’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다 같이 정신없이 바쁠 것을 강요합니다. ‘바쁜 성공’은 틀렸습니다. ‘바쁜 행복’은 없기 때문입니다. 단언컨대, 행복은 느린 겁니다! 287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 경험하는 ‘타당성의 착각’은 의외로 다양합니다. 예를 들어, 계속 떨어지는 주식 종목을 들고 있으면서, ‘이 주식은 다시 오를 거야’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이는 카지노의 도박 게임에서 돈을 잃고 있으면서 ‘지금까지 잃었으니, 이제는 이길 차례야’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291
 
경제는 숫자와 통계뿐 아니라 사람들의 믿음, 기대, 공포, 희망 같은 심리적 요소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단순한 정보나 계산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에게 전달하며 믿게 되는 이야기의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293
 
관점을 바꾸려면 먼저 ‘내 관점’이 존재해야 합니다. 자신만의 판단과 해석이 없는 사람에게는 애초에 바꿀 관점 자체가 없습니다. 관점 전환은 단순한 생각의 기술이 아니라 주체적 사고를 전제로 하는 능력입니다. 진정한 관점 바꾸기는 하나의 관점에서 다른 관점으로 이동하는 것이며, 그 출발점에는 언제나 자기 관점이 존재합니다. 302
 
사람들이 재미있어하는 일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명확한 목표와 즉각적인 피드백, 그리고 도전과 능력이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306

칙센트미하이의 ‘플로우’. 난이도의 수준과 실력 수준의 균형에 따라 경험하는 정서가 달라진다. 난이도가 실력보다 높으면 불안을 느끼고, 실력이 난이도보다 높으면 지루함을 느낀다. 두 요소가 균형을 이룰 때 가장 재미있는 몰입 상태에 들어간다. 계속 재미있으려면 공부해야 한다는 뜻이다. 307
 
2012년을 기점으로 미국 청소년의 우울증과 자살 관련 지표가 유례없이 급증했다. 도대체 2012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12년은 한마디로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어, 사용자들이 24시간 SNS플랫폼에 접속할 수 있게 된 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카너먼의 용어를 빌려 설명하자면, SNS 관련 거대 테크 기업들이 아주 체계적으로 ‘시스템 1-빠른 사고’를 집중 공략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시스템 1-빠른 사고’는 직관적이고, 감정적이며, 에너지를 거의 쓰지 않는 자동적인 사고 과정입니다. SNS는 무한 스크롤, 즉각적인 피드백(좋아요, 댓글)을 매개로 사용자의 ‘시스템 1’을 끊임없이 자극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사용자는 깊은 생각, 즉 ‘시스템 2-느린 사고’의 개입 없이 직관적인 즐거움과 만족감을 위해 밤낮 구별 없이 인터넷 세상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311
 
자신이 ‘좋아하는 것(취향)’을 찾아내고, 그 내용을 끊임없이 공부해야 플로우를 경험하며 재미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12
 

보론. 왜 소통하는가

 
오늘날 SNS의 ‘좋아요’, ‘조회 수’, ‘알림’은 행동주의적 강화프로그램의  성공적인 사례입니다. 이 방법은 현대 마케팅과 소비 행동 관련 분야에도 여전히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자극에 반응하는 수동적인 기계’로 전락시킨다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조건화된 반응 너머에서 ‘나는 왜 존재하는가’를 묻는 인간의 실존적 갈망에는 어떠한 대답도 제시하지 못합니다. 316
 
삶의 목적에 관해 심리학이 제시하는 6가지 키워드: 적응, 조건화, 충동, 판단, 의미, 연결. 318
 
비고츠키는 ‘근접 발달 영역近接發達領域’을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타인과 함께할 때 열리는 발달의 영역’으로 정의합니다. 아이가 혼자 할 수 있는 ‘현재 수준 actual level’과 도움을 받으면 할 수 있는 ‘잠재 수준 potential level’ 사이의 간극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혼자서는 풀지 못하지만, 더 유능한 타인(부모, 교사, 또래)과 함께하면 풀 수 있는 과제의 영역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동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타인이 어떠한 지침을 주는지도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근접 발달 영역’을 작동시키는 가장 대표적인 메커니즘은 ‘함께 보기’입니다. 같은 대상(문제, 그림, 장면)을 가리키고, 같은 요소를 중요하다고 표시하며, 함께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경험을 통해 아동은 단순히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중요한가’, ‘무엇을 잘한 것인가’에 관한 평가를 타인과 공유하게 됩니다. 이것이 내면화되면, 타인이 없어도 ‘내면화된 선생님’과 대화하며, 스스로 해결책을 찾게 됩니다. 321
 
도대체 먹고사는 일과 아무 상관없는 음악은 왜 듣고, 그림은 왜 감상하는 걸까요? 감탄하기 위해서입니다. 삶의 목적을 이보다 더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324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하루에 몇 번이나 감탄하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그러나 감탄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먹고살기에 급급한 일상입니다. 325
 
제임스-랑게 이론을 적용하면, 내 우울한 일상을 바꿀 수 있는 아주 간단하고 확실한 해결책이 보입니다. 감탄의 습관을 들이면 됩니다. 감탄할 일이 생겨서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감탄하면 감탄할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326
 
상호주관적으로 경험되는 삶의 목적, 즉 ‘인정’은 ‘감탄’으로 경험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우리는 감탄하고 감탄받기 위해 삽니다. 왜 돈을 많이 벌려고 할까요? 돈이 많으면, 그만큼 감탄할 일이 많아집니다. 비싼 시계를 차거나 예쁜 가방을 들 때마다 스스로 감탄하게 됩니다. 그러나 돈으로 살 수 있는 감탄은 금세 시들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적 성공을 원합니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타인의 인정을 감탄으로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331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소통은 더 많은 정보도, 더 빠른 연결도 아닙니다. 서로 감탄하는 상호주관적 경험의 회복입니다. 사람이 살 만한 디지털 사회의 조건은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감탄을 통해 서로를 인정받는 존재로 느끼게 하는 존중의 문법입니다.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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